소개

홍보동영상

  • 소개
  • 홍보동영상

설립자(김원근옹)

길지 않은 인생을 가볍게 마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고통을 넘어서는 순간까지
홍익인간의 얼을 펴신 1965년 12월 23일 새벽 2시
청주 맑은 하늘 아래서 눈감으신
전 대성학원 이사장 청암 김원근 선생이십니다.

이분이야말로 어떻게 사는 길이 참되고 보람 있는
길인가를 행동으로 외치신 만인의 사표요
이 땅의 은인이기에 여기에 선생의 일생을
더듬고자 한 것입니다.

선생의 별세소식이 전해지자 전국의
방방곡곡에서 조의가 밀려왔으며
고인을 읽은 이고장 도민들은 사회장으로
선생의 마지막 길을 모셨습니다.
1965년 12월 29일이었습니다.

고 청암 김원근 선생의 영전에 깊은
애도의 뜻을 표하나이다
80성상 인생의 길 고달픔을 모르시고
비바람 찬 소리에 꾸준히 애쓴 보람
천하의 ?? 뜻을 알래라 서라벌 개울물 산천에서
고고의 소리를 바랄 때부터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 파란중첩한 고난의
가시밭길에서 대항해 나아간
선박에게 닥치는 거센 창파 물리치시고
적수공권으로 일어서 마침내 성대한
거액을 던져난민구제와 육영사회에 80평생을
사시셨던 김원근 선생은 가셨습니다.
생존시에 베푸신 시혜는 전비가 없고명성이
사해 진화하셨던 고인, 세우신
학교가 일곱에 여기에 배움을 받은 이가 이만이요
충남북의 출이민의 수만 거수외양된
인재가 국가사회에 심장으로 맥동하고
선생을 기리는 성급표와 국가보상이
그 얼마랴 만은 스스로 영예를 내세운
바가 전무했던 김원근 선생은 이제 구천에 가게 되셨으며
이 애석함을 어찌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무명옷자락에 겨레의 한을 담고 뼈저린 가난 속에서
근검과 절약으로 재산을모았으나
오직 남을 위해 바치신 한 길.
그래서 청암 김원근 선생은 자선의 활부리라고
불리워지는 것입니다.
드디어 이날 정오 선생의 육신을 담은 꽃상여는
영결식장을 떠나 생전의 얼이담긴 청주대학 캠퍼스를
뒤로 두고 우암산 산마루 영혼의 위편으로 향했습니다.

일제하에서 우리나라가 독립을 하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고 깨달은 청암 선생은
그 민족적 힘을 교육에서 찾고자 했던 것입니다.
당시 청주대는 보통학교가하나뿐인 데다가
겨우 두학급만 모집했으므로 어린이들이
배움을 길을 걷지 못하는 딱한 실정이었습니다.
이를 뼈아프게 생각한 선생은 사비를 내놓아
대성보통학교를 세우고 20년동안 수업료 없이 학생을 가르쳤습니다.
그 뒤 1935년에는 청주상업학교 1945년에는
청주여자상업학교를 세웠는데
대성보통학교는 의무교육 실시에 따라
국립학교에 병합시켰으며
청주여상은 나라에 바친 바 됐고
청주상업학교가 학제개편에 따라
오늘의 대성중학교와 청주상업고등학교로
각각 분리됐습니다.
1946년에는 이 고장 최초의 대학으로 청주대학을
그리고 1959년에는 대성여중을
1960년에는 대성여자종합고등기술학교를 각각 설립했으며
선생이 서거하시던 1965년에 대성국민학교를
부활 설립함으로써 학교법인 대성학원이라는
교육의 대단원을 형성하게 된 것입니다.

대성학원의 교육지침은 애국애족 성실근면
자주자활 사회봉사 솔선수범등이며
이는 곧 청암선생의 정신이기도 한 것입니다.

선생의 이와 같이 거대한 교육기관을 이룩함에는
청암 선생 혼자의 힘만은 아니었습니다.
또 하나의 설립자 김영근 선생.
이 분은 청암선생의 동생되시는 분으로
항상 형님과 뜻을 같이하여 대성학원 설립의 초석이 돼셨습니다.
그러나 김영근 선생은 모든 공을
형인 청암선생에게 돌리시고
청년시절 형제분 활약의 주 무대였던 조치원 읍에서
우고의 나날을 보내고 계십니다.

김영근 선생은 청주에도 오시어 집과 학교를 살피시며
대성학원 육성의 보이지 않는 힘으로
든든한 길잡이가 돼주십니다.

또한 김영근 선생은 일년에 한차례씩
고향 경주를 찾아 조상께 성묘하고
형제분이 기구한 운명을 안고 태어난
옛날 오막살이 집에도 들려 고난이 시작된
어린시절을 회상하곤 하십니다.
천년 그리운 꿈이 고이 잠든 신라의 옛 서울 경주.
계림숲속을 싸고돈 반월성이며 그 머리위에
고요히 깔려있는 안압지의
불국사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는 천년 문화의
본산지 경주가 청암 김원근 선생의 탄생지인 것입니다.

1886년 음력으로 10월 10일 청암선생은
신라 흥무대왕 김유신 장군의 후손인
김한중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셨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에 아우 김영근 선생이 고고지성을 울리매
가난했던 이 집안은 더욱 화기가 돌고
부러운 바 없는 행복속에 두 분 형제는
여기 죽순처럼 자라고 있었으니
서러움이란 꿈에나마 생각지 못했습니다.
명문의 후예요 일가문의 사자인 선생은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으나 뜻밖의 재앙으로 하루아침에
모든 가산을 불속에 빼앗기고 이때부터 선생의 집안은
뼈저린 가난이 시작된 것입니다.
선생이 아홉살 되던 어느날 아침 선생은
충청도에서 온 상인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나게 됐습니다.
부모곁을 생전 처음 떠난 외로움을 스스로 깨물며
충청도에 온 선생은 한때 은인의 도움으로
서당공부도 할 수 있었으나 그것도 잠시뿐
은인이 파산을 당하게 되자 정처 없는
유랑길에 오르게 됐으니
선생의 나이 불과 열두살때의 일입니다.

서당친구들이 거두어준 전별금 성냥 석돈을
유일한 밑천으로해서 처음엔 기름장사로
추우나 더우나 허리끈을 졸라매며 이장 저장으로 뛰어다녔습니다.
소년시절 칠년동안 삼천리를 편답하며 무명단발로
때로는 주막집 부엌에서 새우잠을 자며
온갖 고난과 시련을 딛고 일어섰던 선생은
돌아가시던 날까지 그 무렵에 얻은 동상으로
병고에 시달리셨다는 것입니다.

오직 굳은 신념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청년의 푸른 꿈을
사업에 쏟은 선생은 드디어 거상이 되고 일본과 만주에
무역을 해서 성제하니 호중일대 그 이름을 떨치게 됐습니다.
남다른 고생속에 자라온 선생인지라
불행한 이웃이 생기면 아낌없이 구호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일찍이 병오년 대홍수 때에는 자기재산을
송두리째 띄워버렸음에도 남은 곡식을 거두어
수재민에게 나누어 주셨으며
선생이 마흔살 되던 1925년 4월 충남 연기군과 조치원 일대
보리황태가 끼어 미증유의 재난을 겪게 됐을 때는
양곡 570석을 풀어 재민을 구제해 주셨고
먹을게 없어 만주로 이민을 가려는농민들
팔백세대에게 양곡 3300포를 풀어준 일도 있었습니다.

천재지변이나 경제공황에 굶주리던 인근 마을 사람들은
선생의 도움으로 가정을 지키고 마을을 재건해서 행복을
누린일이 부지기수인 것입니다. 그래서 선생의 시혜를 입어
다시 목숨을 이은 이들이 모여 고마움을 새겨둔
수많은 송덕비가 전해내려오고 있습니다.

원래 김공이 타고난 성품이 자선을 일삼는 활불인지라
자루를 기우려 나에게 주었고 쌀을 실어다가 저 사람을 구했도다
그 일이 병정년 간에도 있었고 경계년 간에도 있었다
이에 일편의 비석을 세우노니 이로써 천년의 뒤까지 드리우리라.

민족의 새 기원이 열린 1945년 8월 15일
일제 마수에서 벗어나 해방이 되고
자유와 독립을 마음껏 구가하게 된 광복의 날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힘을 길러야 하겠다고 깨닫고
해방된 조국의 앞날을 짊어질 인재육성의시급함을
통감하며 해방다음에 1946년에 청주대학을 설립하신 것입니다.

해방이 되자 저마다 날뛰기만 하는 혼란이 닥쳐왔을 때
선생은 자칭 애국자가많음을 한탄하시고
이론보다 실천가가 필요한 국가적 요청을 깨달아
오직 육영사업과 자선사업에만 몰두하신 것입니다.
학교와 사업관계로 손님들이 자주 찾아왔으나
항상 노부를 이끌고 몸소 손님을 맞으신 선생은
손님들과 얘기하기를 퍽 즐기셨습니다.
그리고 선생은 남을의지하지 말라는
당신의 신념을 역설하셨으며 근검하고 절약하는
생활태도를언제나 강조하셨습니다.

선생이 별세하시기 일년전 1964년 5월 5일
학교법인 대성학원 창설 40주년 기념식전에
참석하신 선생은 이 날을 살아서 맞으매
너무 감격스러워 아무 할말이 없다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선생은 언제나 자기의 일을 남에게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생의 위대한 공적을 국가와 사회가 모를 리 없어
각종 포장과 훈장으로 치하하기에 이르렀습니다.
1962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부터 공익포장을
그리고 1964년에는 대통령으로부터 국민문화훈장을 받으신 것입니다.

아 그러나 선생은 가셨습니다.
이 고장의 은인이요 만인의 스승으로 칭송받던
청암 김원근 선생은 저 세상으로 가신 것입니다.

선생이 몸소 택해준 우암산 산마루
대성학원 판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영원한 선생의 형태?
선생은 저 세상에 가셔서도 대성학원을 몸소 살피려 하셨습니다.
흙에서 나서 흙으로 가고마는 인생
어찌 선생의 묻힘을 서러워만 할 것이겠습니까

청풍이여 선생의 벗이 되어 이 곳에 머물라
찬란한 석양이여 선생의 평화로운
잠자리를 그대가 지키라
기름진 들판의 오곡이 무르익으면
땅속의 누우신 선생의 마음에도
즐거움이 스며들리라
대성캠퍼스의 젊은 절규가 하늘을 찌를 때
선생은 지하에서도 웃음지으시리라
소년시절 몸에 박혔던 그 얼음덩이는
생전에 선생을 괴롭혔지만은
이제 땅속에서 녹아 영롱한 구슬이 되고
오색찬란한 보석이 되었을지니
선생이시여 부디 명복을 누리옵소서

생전에 불교를 신봉하신 선생은
우암산 기슭에 절을 지으시어
석가의 자비를 마음속에 심으셨던 것입니다.
묵묵한 선생의 용자는 불상의 위엄이요
만인에 대한 자애로움은 불심의 자비인 것입니다.
유족들은 틈 있을때마다 절을 찾아
부처님앞에서 선생의 명복을 비는 것입니다.

님은 가시고 외로움은 남아
오늘도 쓸쓸히 뜨락을 거니시는 미망인 김경희 할머니.
귀여운 손주들마저 밖으로 나가면
할머니는 말할 수 없는 고적감에 젖어
뜨락과 정원으로 가며 선생의
손길이 간 곳을 더듬는 것입니다.

하고 많은 일을 두고 선생이시여
어이 홀로 구천에 가게되셨나이까
사방을 둘러보아도 선생의 숨결이 밴 것들
그 덕망어린 미소지으시며 반기시던 모습 어디가시고
뵈올길이 없나이까 선생은 절박한 생활속에서
항상 성실근면하셨고 매사에 공명정대하며
말씀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바위같이 무거우셨습니다.

"40년간에 말이지 먹을 줄도 모르고 입을 줄도 모르고
매일 잘 먹고 잘 입고 그래서 요릿집에 와서
술이라도 한잔 먹었으면 말이여 그런 짓 하면 못할 겁니다.
못해봤어요 할 겨를이 없어요
아침이면 요새로 말하면 다섯시 반쯤되서 일어나가지고
밤 열한시까지 열두시까지 연구해서 생각해서 뭘 만드는
그런 생각하느라고 뭘 할 겨를이 없는데
그 중에다가 학생이 지금 오륙천명 있습니다."

선생은 직접 제재소를 경영하시고 건물 건축 시에
일일히 지휘감독 하셨으며 그 건축의 견고함을 이룬 것입니다.
선생이 안 계신 지금은 미망인 김경희 할머니께서
선생을 대신해서 제재소에 나와 돌보시곤 하십니다.

선생은 맨주먹으로 기신해서 고난을 이기고
성제하신 인간승리의 산 증인이셨습니다.
남의 도움 없이 피와 땀으로 이룬 사비를 공을 위해
일곱의 학교를 세우신 선생님의 생활신조와
사사의 내핍생활은 탄복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종이 한 장도 헛되이 쓰지 않으시어
웬만한 문서나 편지는 담뱃갑을 뜯어
그 여백을 사용했다함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한 일년 동안에 잘 쓰는 반모지 한 서너장 씁니다.
반모지 한 서너장 그럼 뭘하냐 담배를
먹어서 담뱃갑을 뜯어서 그 용지를 씁니다."

보물처럼 간직된 저 담뱃갑 종이 한장 한장 마다에
선생의 위대한 정신이 깃들어 있는 것입니다.

선생이 서거하시기 바로 전인 1965년 7월 5일
선생의 뒤를 이어 제2의 이사장에 취임하신
영식 김준철 이사장은 혁신을 지도이념으로 내세우고
선친의 육영이념을 계승, 학원육성에 전력을 다 하고 있습니다.

와우산 기슭에 아담하게 자리 잡은
대성학원의 각급학교 학생들.

장차 국가의 기둥이 될 어린 새싹들이여
오래 푸른 창공처럼 자람에
불편을 모르는 학생들을 보십시오
때론 코흘리개 꼬마들의 말동무가 돼주기도 하고
때론 인자한 할아버지가 돼주신 선생님.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라
부지런히 닦고 익히어 이 나라의
튼튼한 새 일꾼이 되어라
덕망 있는 사람이 되어라
남을 내몸 같이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라
튼튼한 사람이 되어라 차고 던지고 받고 뛰어라
무거운 이 나라의 일을 꾸려나갈 싹들아

지덕체를 연마시키기에 정성을 아끼지 않으셨던 청암 선생.
어지신 선생의 뜻을 받들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배우고
익히며 활용하고 있습니다.
국민학교에서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남녀학생들이
오늘도 진리탐구와 인격함양에 여념이 없습니다.
가신 님의 거룩한 뜻이 헛되지 않게 남다른 결심과
포부를 안고 공부를 하는 칠천여 학생들.
교실에서 혹은 운동장에서 혹은 실습실에서
그들은 저마다 타고난 소질을 개발하고 새역사를
창조할 힘을 기르면서 청암선생의 태양처럼 빛나는
건학정신을 받들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 생활을 영위하는데 있어 여성이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지대함을 생각하시고 여상을 설립하신 이래
그 교육에 있어 이론과 실제를 병합 터득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선생의 말씀은 구구절절이 가난한 인생체험에서
얻은 생의 금언이요 교훈이었습니다.
남을 의지함은 벌써 패망했다는 증거다라고 말씀하셨고
남에게 구제받은 사람은 남을 구제해야 한다고
보은지덕을 교훈하시며 애국하는 시범을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학원 내 각급 학교의 봉직 하는 삼백여 선생님들도
명문사학의 교직자라는 긍지를 가지고 열과 성으로
학생지도의 만전을 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배우고 익힌 사각의 학사들이 오늘도 배출되는 것이며
또 이미 배출된 사회역군들이 수만을 헤아리는 것입니다.

고진감래라 하기에는 오히려 평범한 말이고
선생의 일생은 너무도 쓰리고 괴로웠던
전반생과 영광된 후반생의 상반된 양극이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이나라 장래를 걱정하시고 눈을 뜨시면은
이른 아침부터 육영사업에 동분서주하시던
선생님의 얼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속에 남을 것입니다.
오늘 대성의 이름은 돈에는 이를 것도 없이
전국에 그 명성을 떨쳐 학술 체육 예능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장래 국가의 기둥들이
선생의 웅지를 받들어 배우고 단련하고 있습니다.

흐느끼는 오열 속에 꽃상여가 올라가던 우암계곡.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사이하여
왼쪽 산마루에 선생이 잠자시고
오른편에는 할머니가 묻히실 가분이 있습니다.
선생이 그러했듯이 할머니도 자신이 묻힐 땅을
바로 이곳에 마련해 놓은 것입니다.

선생의 유덕을 흠모 하고 명복을 비는 추도식은
매년 선생의 탄신일인 음력 10월 10일을 택해서
추모기념사업위원회 주관으로 고행하고 있거니와
청주대학 학생들은 개교기념일인 6월 6일에 선생의
묘소를 찾아 매년 한번씩 천도제를 올리고 있습니다.

권세가 높아 잘 삶이 아니오
세력이 부해서 뛰어나게 삶 또한 아니오
말 없으나 남이 모르게 성실하게 인류를 위해 겨레를 위해
그 끼친 바 공헌이 클 때 역사는 가리켜 위인이라 칭하옵니다.
말이 없는 가운데 몸소 실천으로 젊은 지성을 일깨워주신
영원한 스승 청암 선생.
이제 지하에서도 즐거운 미소를 띄우시기를.

민족 수난의 역사 위에 반 백년을 숨쉬어 온 대성학원.
오늘의 수난보다 내일의 번영을 갈구하는 슬기의 영토
일찍이 이나라 민족의 선두에서 육영의 터전을 닦고 길러 오십년.
그동안 온갖 쓰라림과 고초를 마시며
혹은 건설하고 혹은 파괴당하며
한 때는 빼앗기고 또는 수리하고 증설해서
여기 김원근옹이 이루어 놓은 육영의 전당 대성학원.
이제 이 문을 나온 수만여 졸업생들은
이나라 각개 각층의 역군이 되어
민족 중흥의 역사적 과업을 완수해가고 있습니다.
항상 푸르른 나무처럼 싱싱하고 윤기 나는 저 대성학원의 아들딸들.
문을 두드리는 이 있어 가슴 설레이고 16년간의
형설의 공은 활짝 트인 우암로를 따라 무한한 내일에 이어집니다.

청암선생은 대성의 얼, 대성의 얼은 조국의 심장
그 줄기찬 맥박이어라 1886년에 나시어1965년에 서거하신
청암선생의 80성상은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영원의 생명에 이어진 위대한 일생이었습니다.

선생이 가신 길이야말로 진정 값있고 보람된 길이요
선생의 정신이야말로 꺼지지 않는 횃불임을 우리는 굳게 믿는 것입니다.

담당자 정보